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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야기

90넘은 노모의 눈빛

by Laurier 2020. 7. 2.

어제는 지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어요. 지인분 중에 한 분이 어머님 연세가 90이 넘으셨는데 밤에 잘못 일어나셔서 허리를 다치셔서 수술을 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노모는 아들이 깰까봐 돌봐 주시는 분께 말하지 말라고 하셨고 아침이 되서야 알게 된 아들은 노모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셨나봐요. 허리뼈에 금이가서 시술을 해야 한다고 하셨데요.

노모가 수술하러 들어가는 날 아들 눈을 보면서 그렇게 걱정을 하시길래 아드님이 '별거 아니야, 간단한 거니까 좀 그만해!'라고 말했답니다. 그분 말씀이 90이 넘어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가보다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90이 넘든, 젊은이든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거죠. 근데 그때 노모가 보여주었던 눈빛이 정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란 생각을 해 봤습니다.

90평생 자식을 눈에, 마음에 담고 사셨던 분들이 부모잖아요. 그렇게 계속 영원이 내 곁에 있고 내가 영원히 자식을 지켜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꿈에서 깨어나서 현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잖아요.

아, 내가 더 이상 자식을 지켜줄 수 없구나. 더 이상 저 애의 모습을 내 눈에 담아낼 수가 없구나. 나 없이 저 녀석이 잘 지낼 수 있을까.... 등등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해 봅니다.

당신이 밤 늦게 넘어져 다쳐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이라도 잠이 부족한 자식을 위해서 깨우지 말라 하시고 밤새 아픔을 참아내신 분이시잖아요. 그런 분이 자식을 위해서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는 것, 더 이상 자식을 품을 수 없다는 것, 그런 것들이 교차한 눈빛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간절히 자식을 담아두고 싶었던 눈빛.

부모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각자의 부모가 있고, 그 부모의 모습도 다 다르겠지만, 그래서 부모가 이러해야 한다는 정답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 부모님들은 늘 그렇게 자식을 위해서 자신을 놓고, 자식들을 바라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내가 간직하고 있었던, 내가 품고 있었던 것을 놓는다는 것이기에 두려운 건가봅니다. 내가 죽어 없어져 이 세상이 나를 잊어버릴까가 두렵고 억울하기 보다, 내가 사랑했던, 내가 품고 있었던,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 더 이상 그것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 그게 두려운가봅니다.

문득 노모의 눈 속에 들어 있는 아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 아들 역시 똑같은 모습의 부모가 되어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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