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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후기

시절 일기 - 김연수

by Laurier 2019.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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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일기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속의 평범한 개인이자 가장이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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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두 달전에 예약하고 내게 온 책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참 먹먹하기도 하고 난해하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일기 형식이지만 한 개인의 시간이기도 하고 모두의 시간이기도 했던 일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중 세월호 사건에 관한 얘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고, 작가로서의 책임을 지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문학이 이 어린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문학만이 그 아픔을 달래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영문학도임에도 한국 문학을 잘 알고 있는듯 했고, 글 후반부에는 책을 읽고난 후의 서평을 읽고 있는 듯했습니다.

책 후반부에 실연의 아픔을 견디어 내는 한 남자의 소설이 나오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찾다가 인터넷에서 '사랑'에 대한 글들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 전 국민의 가슴을 찢어지게 했던 아이들의 또는 그 부모들의 문자입니다.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먹먹하기만 합니다. 평소라면 말을 듣지 않았을 아이들이 왜 하필 그 바닷속에서 죽음의 갈림길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말에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고 있었는지...

그 나이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그때. 학생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거든 평소 너희들이 하던대로 아무 말도 고분고분 듣지 말아라. 제발...'

그 날을 기억해야한단 생각이 드신다면 이 책을 꼭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후반부에는 문학에 관한 난해한 얘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꼭 읽고,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p. 17
요컨대 카프카에게 일기란 사전에 규정된 형식이 없는 글쓰기, 따라서 완벽하게 쓴다는 강박 없이 쓸 수 있는 글쓰기였다. 사전에서는 일기를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나라면 '읽는 사람이 없는, 매일의 글쓰기'라고 말하겠다. 심지어는 자신조차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써야 일기가 된다. 일기를 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쓰는 행위 그 자처에 있기 때문이다.

p. 26
'잇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하이쿠는 일본 동북지방 대지진으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때, 처참한 파괴 현장 사진과 함께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 속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p. 28
마음으로든 몸으로든 타인과의 관계에서 놓여나게 되면서 늙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삶의 가장 큰 반전이 숨어 있었다. 늙으면 더이상 타인의 관심 대상이 되지 못하니 외롭고 서글퍼지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이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쓸 필요가 없으니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자는 긍정적 태도가 생긴 것이다. 평생 편집자로 살아온 그녀에게는 글쓰기가 바로 그런 일이었다.

p. 31
변함없이 눈부신 그 여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지극히 아름답지요. 그리고 늙으면 그 사실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생각하고 기억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게 돼요.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지요. 모든 것에.'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세상사가 못마땅해지는 내게 나치 수용소까지 다녀온 이 할머니가 덧붙인다. '나는 악에 대해 잘 알지만 오직 선한 것만 봅니다.' 이런 할머니들이 있어 나는 또다시 장래를 희망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나의 장래희망은, 다시 할머니, 웃는 눈으로 선한 것만 보는 할머니가 됐다.

p. 38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가족이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내 안에 들어온 꺼림칙한 타자의 존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라는 오답을,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더없이 정확한 대답을 제시하는 영화다. ~~
내 마음속에 들어온 타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이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영상은 없을 것이다.

p. 63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집단적 무지 혹은 망각을 기반으로 축적된 부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부의 축적을 위해 한국 사회는 사회적 원인에서 비롯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켜 관리한다. 물속 아이를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부모들에게 미개하다고 말하는 까닭이, 그들을 '순수한 유가족'이라고 일컫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의 고통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한, 지금까지의 관행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적폐는 적폐를 청산할 수 없고 국가는 국가를 개조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을 향한 연대에서 나온 책임감만이 이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p. 76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인생은 걷는 일입니다. 걸음을 멈추면 일이 안 됩니다. 늘 걸어야 합니다'라든가 '젊은이들이여, 잘 들으시오! 시류를 거슬러가시오!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혹은 '기쁨! 절대로 슬픈 남자, 슬픈 여자가 되지 마십시오' 같은 말들. 교황을 가까이에서 뵙기 전이었다면 위로조차 안 되는 흔한 말들이라고 여겼을 그 말들이 새롭게 들렸다.

p.94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둠만을 볼 뿐이다. 그게 바로 인간의 슬픔과 절망이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이 세계를 다르게 보려면 빛이 필요하다. ~~ 어떻게 하면 슬픔과 절망에서 벗어나 이 세계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온 동네 꽃들이 모두 피어나던, 내 고향의 부활절 풍경이 그런 새로운 빛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

p. 104
외면한다는 건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지 않으며 머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공백 상태가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무지와 무능의 증명이 결백의 증거라도 되는 양 자신은 전혀 몰랐다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무지와 무능을 자처한다. 이것이 그들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변론이다. 최선일 때, 무지하고 무능한 정권이었다는 얘기다.

p. 107-108
라틴어에서 진실(veritas)의 반대말은 거짓(falsum)이 아니라 망각(oblivio)입니다. ~~ 진실한 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기억하는 것만이 진실이 되리라. ~~
아이들이 남은 우리에게 부탁할 게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자신들을,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자신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잊지 말아달라는 것이 아닐까. 부디, 그러니까 기어이, 꼭, 아무쪼록......

p. 121
암흑 속의 빛. 그건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빛이다. 그렇기에 기적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의 베르너처럼, 깊은 밤 심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목소리에 단 한 번이라도 귀를 기울여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이다.

p. 143
그제야 나는 거울은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울 속에 늙은 얼굴이 있다고 해서 그 거울이 그를 늙게 만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 세계는 그 거울과 같다. 세계는 늘 그대로 거기 있다. 나빠지는 게 있다면 그 세계에 비친 나의 모습일 것이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의문은, 그렇게 해서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됐다.

p. 153
이 인생에서 내가 제일 먼저 배웠어야 하는 것은 '나'의 올바른 사용법이었지만, 지금까지 그걸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걸 모르니 인생은 예측불허,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이런 형편인데도 불운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게 다 '나'의 사용법을 몰라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다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 173
어떤 일로 실의에 빠져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을 때, 우리가 빠져드는 대부분의 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옆에 있는 사람과도 마음이 통하지 않는데, 멀리 있는 저자와, 그것도 이미 몇백 년 전에 죽었거나 성별이나 인종도 다른 누군가가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의 위안이란 엄청나다.

p. 238
덕분에 그의 작업실에서 나는 워드프로세서를 처음 봤다. 대우전자에서 만든 르모2였다. 무게는 6.5킬로그램에 메모리는 64킬로바이트, 보조 저장장치인 3.5인치 플로피디스크드라이브에는 A4용지 240매 분량의 문서를 저장할 수 있다고 했다.

p. 301
우리의 삶은 우리를 매혹시킨 근대적 기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닮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구불구불 흘러내려가는 강을 닮아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곧잘 지체되며, 때로는 거꾸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지만, 그때가 바로 흐름에 몸을 맡길 때라고 생각합니다. ~ 여전히, 깊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역사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때, 우리의 절망은 서로에게 읽힐 수 있습니다. 문학의 위로는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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